송년회가 끝이 나고 이제 좀 연말을 느끼려 하니 새로운 CEO께서 취임/부임하시고 신년회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우리 회사는 11월 말 ~ 12월 초를 기점으로 모회사의 임원 인사발령이 발표되고 그에 따라 CEO의 거취를 알 수 있다.) 새로 오시는 CEO께서는 과거 우리 회사의 팀장, 임원을 경험하셨고 모회사로 돌아가신 후 다시 우리 회사의 CEO로 부임하시는 경우라, 우리 회사 직책자들을 이미 다수 알고 계시고 회사의 시스템도 알고 계신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과거 팀장, 임원이실 때 인망 및 평판이 좋으셔서 구성원들의 기대가 굉장히 컸다. 어떤 CEO를 모시게 될지 기대가 된다.

 

1. 준비

업무분장표를 아무리 자세히 봐도 신년회 준비 업무 관련된 내용은 없다. 그런데 왜 내가 신년회 준비 PM을 맡아야 하는 거지? 애초에 송년회 준비 업무도 내 업무분장표에 없었는데! 다시 전임자를 찾았다. 전임자는 업무분장표에는 내가 맡을 [주기적인 고정 업무]만 정리되어 있고 [스폿성 업무]는 정리된 것이 없다고 한다. 송년회와 신년회는 16년도에 당시 CEO께서 처음 지시하신 거라 업무분장표에는 미처 못 넣었다고 한다. 송년회와 신년회 모두 K매니저 업무로 배정되었었는데 모두 자신에게 떠넘겼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불만을 모두 들어준 후에 전임자와 대화를 끝내고 K매니저를 찾아갔다.

나 : 16년도 신년회 K매니저님께 전임자와 같이 준비하셨었죠?

K매니저 : 그거 난 이제 안 해. K2가 너랑 같이 할 거야.

옆에서 듣고 있던 K2매니저의 얼굴 표정이 살짝 보였다. 표정이 좋지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우리 팀 막내 매니저다.

나와 K2매니저는 자리를 이동해서 커피 한 잔 하면서 말했다.

나 : K2매니저님. 신년회 준비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16년도 자료 보니까 새벽 일찍 산 타고 근처 음식점에서 식사하고 해산했던 것 같은데... 그런 흐름으로 기획하면 될까요?

K2매니저 : 네, 맞아요. 그런데 그런 건 별로 어렵지 않아요. 어렵거나 귀찮은 건 대략적인 일정 수립하고, 산 정상에서 사진 촬영을 위한 신년회 플래카드와 카드 문구 준비하고, 산에 올라가기 전 나눠드릴 물, 간식 등 물품 준비하고, 이런 것들이 막상 하려면 귀찮고 손 많이 가고 그렇죠. 그나저나 이거 작년에 K매니저랑 전임자 분하고 한 일이고 저는 그냥 서포트만 살짝 한 건데 이렇게 일을 넘기네요. 아무래도 팀장님도 아닌데 일을 넘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팀장님께 말씀드려 보려고요.

나 : 아, 넵. 그렇게 하셔야죠.

짧게 대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왔다. K2매니저는 그대로 팀장님께 향했다. 둘이 빈 회의실로 들어갔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나온다. K2매니저의 얼굴 표정은 밝지 않았다. K2매니저에게 메신저를 통해 물어봤다.

나 : 매니저님. 팀장님께 내용 잘 말씀드렸어요? 신년회 업무에 대해 뭐라 하셨어요?

K2매니저 : 팀장님께서 저보고 하라시네요. 이미 K매니저가 팀장님께 가서 미리 약 쳐놨나 봐요. 이 XX는 일은 안 하면서 입만 털고 다니는데 하아... 진짜 짜증 나네요...

K2매니저가 불만을 쏟아내는데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나 : 그럼 우선 어디 산으로 가는지를 결정해야 하는데 편법을 써서 단축시켜 보시죠. 작년에 답사하셨던 산들이 있으니까 조금만 내용을 바꿔서 답사한 것처럼 말씀드리고 그 산들 근처 약 100명 인원 수용 가능한 밥집들만 조금 더 찾아서 보완해 봐요.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부분은 신년회 플래카드 문구겠네요.

K2매니저 : 네, 그렇게 하시죠. 문구는 각자 생각하고 퇴근 전에 잠깐 미팅해서 아이디어 공유 하기로 해요.

회의실에서 짧게 회의를 마치고 퇴근하기 바로 전에 K매니저가 들어온다.

K매니저 : 신년회 준비는 잘하고 있냐? 밥은 먹고 해야지?

나 : 신년회 준비 거의 다 마쳤습니다. 밥은 안 먹고 이제 퇴근하려고 합니다.

K2매니저 : 매니저님께서는 퇴근 안 하세요?

K매니저 : 너네 일하는 것 같아서 걱정돼서 들어와 봤지. 준비 거의 다 했으면 한 번 보자.

느낌이 좋지 않았지만 K2매니저가 간단히 브리핑했다.

K매니저 : 야. 근데 신년회는 꼭 산으로 가야 하냐? 다른 회사들도 산으로만 가는데 참신한 장소 없을까?

나 : 혹시 뭐 다른 아이디어 있으세요?

K매니저 :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나도 이제 생각난 건데. 지금부터 너네들이 생각해 봐야지~.

신년은 정말 모두에게 감사하고 좋은 마음으로 지내고 싶었는데 K매니저가 나의 모든 다짐을 부서뜨린다. 불쾌한 마음으로 퇴근하면서 산 말고 다른 좋은 곳이 어디 있을지 K매니저의 말이 계속 생각났다.

 

2. 결정

다음 날 출근하니 팀장님과 K매니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8시 30분인데... 팀장님은 원래 이 시간에 출근하시는 것이 일반적인데 K매니저는 왜 이렇게 일찍 출근했지...?' K매니저는 보통 8시 40~50분 사이 출근하기에 이른 시간 출근한 것이 조금 의아했다. K2매니저와 산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지 논의하기 위해 회의실에서 미팅을 가졌다. 미팅을 시작하려 하는 찰나에 K매니저가 들어왔다.

K매니저 : 너네 여기서 뭐 하냐?

나 :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산 말고 다른 좋은 대안이 있을지 생각해보려고 했습니다.

K매니저 : 아, 맞다. 그거 말씀드렸다. 청계산으로 가기로 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라.

K매니저가 회의실을 나가고 K2매니저와 나는 잠시동안 멍하니 서로를 바라봤다.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밖으로 커피 한 잔 하러 나갔다. 긴 침묵을 뚫고 대화를 시작했다.

나 : K매니저님께서 보고 잘하셨나 봐요. 일사천리로 목적지 확정돼서 다행이에요.

K2매니저 : 그건 다행이지만, 팀장님과 부서장님께 어떻게 보고 드렸는지를 몰라서 그렇죠. 그 사람 성향상 잘했다고 느껴지는 보고는 분명 자기 공으로 돌렸을 테니까요. 매니저님하고 제 얘기는 하지도 않았을걸요?

난 대답은 하진 않았지만 그 생각에 절대 동의했다. K매니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 : 우리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우리 둘이 팀장님과 부서장님께 보고 드리면 이것저것 챌린지 들어오고 피드백 들어오고 힘들었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K매니저가 그래도 신속하게 기획서 컨펌받아서 실무 준비만 하면 되잖아요.

우리 둘은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순 없었지만 그래도 일과가 남았기에 속내는 감추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회사원들이 이런 불합리함 속에서도 인내하고 냉정을 유지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새해 다짐을 하나 더 마음속에 새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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